프로 바둑 기사에게 '복기'란 무엇일까요?
프로 바둑 기사들은 대국이 끝난 뒤 반드시 복기(復棋)를 합니다. 이미 끝난 승부를 다시 처음부터 되짚으며, 한 수 한 수를 놓아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닙니다. 이겼느냐 졌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입니다.
- 왜 그 상황에서 이 수를 선택했는가
- 다른 선택지는 무엇이었는가
- 상대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가
- 당시 형세 판단은 합리적이었는가
흥미로운 점은, 프로 기사일수록 "그냥 느낌이었다"라는 설명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설령 직관적으로 둔 수라 하더라도, 그 직관이 어떤 경험과 판단의 축적에서 나왔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진짜 실력으로 인정받습니다.
스타트업 대표님의 지난 1년은 복기 가능하신가요?
이제 바둑판을 잠시 내려놓고, 대표님의 스타트업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1년 전,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은 무엇이었습니까?
반기 또는 분기 단위로 보면, 그때 세운 가설은 무엇이었습니까?
한 달 전의 주요 실행은 어떤 판단과 분석 위에 있었습니까?
지난주에 내린 결정은 무엇을 기대하고 선택하신 것이었습니까?
혹시 이런 답이 떠오르지는 않으십니까?
"그때는 상황이 급해서…"
"다들 그렇게 하길래…"
"지금 와서 보면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답변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는 실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실행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계획이란 '문서'가 아니라 '복기의 기준'입니다.
계획이라는 말을 하면, 많은 대표님들께서 두꺼운 사업계획서나 투자자료를 떠올리십니다. 하지만 CEO 코칭 현장에서 보면, 계획의 본질은 훨씬 단순합니다.
계획은 결국 세 가지 질문에 답하는 과정입니다.
1. 지금 이 판의 형세는 무엇인가?
- 시장, 고객, 경쟁사, 그리고 우리 팀의 현실은 어떠한가
2. 이번 국면에서 반드시 노려야 할 승부 포인트는 무엇인가?
- 모든 것을 다 하지 않고,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3. 이 수를 두는 이유는 무엇인가?
- 성공했을 때 무엇을 확인하려는가
- 실패했을 때 무엇을 배울 것인가
이 세 가지가 정리된 실행은,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반드시 다음 수를 위한 자산으로 남습니다.
실행만 강조할수록,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됩니다.
계획 없이 실행만 반복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실패의 원인을 외부 환경 탓으로 돌리게 됩니다. "이번에는 운이 없었다"는 말이 늘어납니다. 비슷한 의사결정을 다른 이름으로 다시 하게 됩니다. 이는 개인의 역량 문제가 아니라, 복기할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준이 없으면, 배움도 축적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계획이 있는 실행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 가설을 검증하려 했고, 결과적으로 이 부분은 틀렸다는 것을 알고 방향성을 변경할 수 있었습니다."
이 한 문장이 말해질 수 있다면, 그 실행은 이미 성공적인 학습입니다.
대표님의 역할은 '돌을 많이 두는 사람'이 아닙니다.
스타트업 대표님의 역할은 누구보다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수를 둘지 결정하고, 왜 그 수를 두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프로 바둑 기사가 장고 끝에 한 수를 두듯, 대표님 역시 바쁜 실행 속에서도 잠시 멈추어 생각해야 할 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나중에 반드시 이렇게 돌아와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이런 판단을 했고,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